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담의 난 (문단 편집) == 의의 == 비담의 난으로 인해 김춘추 일파의 행보에 제동을 걸 주요 귀족세력이 대부분 소멸했으므로[* 물론 [[알천]]과 같이 여전히 살아남아서 김춘추와 어느 정도 경쟁하는 귀족세력도 있었으나, 알천과 김춘추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어쨌든 비담보다는 덜 적대적이었던 건 확실하다.] 이후 즉위한 [[진덕여왕]] 재위 기간 중에는 김춘추의 성향대로 대대적인 정치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 때 [[신라]]의 중앙집권화와 중국화([[당나라]]화)가 크게 진전되었고, [[태종 무열왕|김춘추]]와 [[김유신]] 세력 등의 진골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비담의 난이 진압되고 그 후 진덕여왕 재위 기간 중 신라에선 중앙관서조직이 크게 확충되었다. 진덕여왕 5년인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倉部)와 형률과 입법을 관장하는 좌리방부(左理方部)가 창설되었으며, 국가의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집행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집사부는 왕에 직속되어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왕권과 중앙 집권력을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